이사를 온 후로 블로그에 글을 쓸 거리가 사라졌다. 혼자 살면 사회적 소수자로서 겪는 부조리함의 80%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면 물론 많은 위험들이 있지만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굳이 다가와서 말을 할 일은 별로 없고 집에서 겪는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호칭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름으로 부르거나 직업에 관련 된 호칭으로 날 부른다. 하지만 집에 가면 한국에서는 서양과 달리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가족끼리 쓰는 호칭을 쓰는데 한국어는 많은 단어들이 성별 구분이 없는 좋은 언어임을 잊게 만들 정도로 모든 호칭에 성별이 붙어 있다. 아들, 딸, 언니, 누나, 형, 오빠, 삼촌, 이모, 고모 등 성별이 없는 호칭이 없다고 볼 수 있는데 저 호칭들이 나를 부르는 데에만 쓰이는 게 아니라 뒤따라 오는 말들이 뻔하므로 큰 상처를 지속적으로 받는다.

복장

난 여자고 여자옷(이라 불리는 것들)을 입고 다닌다. 당연한 것이지만 집에 가면 다르다. 내가 원하는 옷을 입고 다닐 뿐인데 가족들은 그 옷을 입고 나가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청소년의 경우엔 무슨 부당한 벌을 받을 지 모른다. 나는 이게 너무 짜증났기 때문에 스스로 돈을 벌어서 집에 말도 안 하고 집을 구해서 혼자 살게 되었다.

자주 만나지 않는 친척들을 만나게 되는 명절이나 관혼상제 등의 이벤트에는 더 짜증나게 되는데 내가 내 마음대로 입고 다녀도 뭐라 하지 않고 옷도 사 주는 엄마마저 그 때만은 내 신체적 성별을 강요하며 다른 옷을 입히려고 애를 쓴다. 사회적 소수자가 아니더라도 고통스러운 온갖 오지랖 넘치는 개소리들을 들어야 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 난 그럴거면 차라리 날 빼놓고 가라고 하고 혼자 집에 있는다.

장례식 등의 이벤트는 안 간다고 하기 애매한데 나이 순서가 아니라 성별 순으로 먼저 정렬하는 상주, 신체적 성별에 따라 상복을 입는 것 등이 주로 문제다. 내 경우엔 친척이 머리카락 길이로 시비를 걸길래 그딴 개소리 지껄일 거면 앞으로 나랑 말도 섞지 말라고 화내면서 못을 박았다. 숏컷인 여자, 장발인 남자들은 장례식에 갈 때마다 머리카락 스타일을 바꿔야 하나? 옷만 예의를 갖춰 입으면 된다. 머리카락의 색, 길이 등은 함부로 바꿀 수 없는 외모의 일부로 인식하는 게 정상적인 사람들이다. 또 다른 친척은 “<내 이름="">은 왜 안 와?"라고 하기에 "여기 있어요"라고 했더니 "왜 그렇게 생겨서 날 헷갈리게 하느냐"고 화를 냈다. 내가 이렇게 생긴 걸 뭐 어쩌라고.. 제조사에 가서 따지시든가.

사회적 역할 강요

성별로 나뉘는 사회적 역할 강요는 직장보다 집에서 가장 먼저, 가장 자주 겪게 된다. 여자에게만 통금시간을 거는 건 그렇지 않은 집을 찾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흔한 일이고 빨래, 설거지 등의 집안일은 모두 여자에게 간다. 우리집은 세탁기가 있는데도 여동생에게는 자기 빨래를 스스로 손빨래 하는 걸 강요한다. 너무 어이가 없었고 제정신으로 그런 환경에서 버티기가 힘들었다. 통금은 10시인가까지였는데 9시까지 나가서 친구와 밥 먹고 오겠다던 동생에게 8시가 되자마자 왜 안 오냐고 전화를 걸어 왜 그렇게 늦게 오냐고 화를 내던 걸 보면 얘가 여태까지 그 시스템에 욕도 안 하고 웬만하면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나에게는 신체적 성별 때문에 그런 이상한 강요가 적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고통스럽다. 나에게는 강요하지 않으면서 동생에게만 말도 안 되는 걸 강요하고 동생이 그것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할 때마다 나는 동생에게 이딴 집에 있지 말고 혼자 사는 걸 추천했고 지금 결국 혼자 살면서 행복한 것 같다.

혼자 살면서 좋아진 것

나는 3일 정도에 한번씩은 그냥 샤워/목욕을 하는 게 아니라 추가적으로 몸을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래서 화장실에 오래 있어야 한다. 거의 한 시간 정도를 화장실에 있어도 눈치 안 볼 수 있는 건 혼자 사는 생활의 장점이다.

옷도 내가 사서 내 마음대로 입는다. 현관 문을 나가기 전과 집에 들어가는 그 순간에 무슨 말을 들을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별 거 아닌 게 아니라 꽤 큰 문제다. 혼자 살지 않을 땐 옷을 가방에 넣고 나가서 공원 화장실에서 갈아입고 다닌 적도 있었다.

온갖 강요적인 말을 안 들어도 된다. 나는 내 방식대로 사는데 신체적 성별이나 서로의 다름으로 인한 이상한 강요 같은 걸 받고는 절대 살지 못한다.

친구를 마음대로 부를 수 있다. 엄마는 내가 누구와 놀든 “그런 애”랑 왜 만나냐는 식으로 시비를 거는데 그 친구가 집에 간 후에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서 대놓고 말을 한다. 심지어 자기가 물건을 아무렇게나 둬서 잊어버린 걸 내 친구부터 의심하고 “걔가 가져간 거 아닌가 물어봐라”라는 말을 한다. 이젠 그딴 개소리를 안 들어도 되고 친구에게도 그런 개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난 새벽에 잠을 잘 안 자기 때문에 배가 고플 때가 있다. 배는 고픈데 밖에 나가서 사 먹으면 “그 시각에 왜 나가냐”, 집에서 해 먹으면 “왜 그렇게 달그락거리냐”라는 말을 하는 주제에 굶으면 “뭐라도 해 먹든가 하지 왜 멍청하게 굶냐”는 말을 들었다. 지금은 그냥 내 맘대로 해 먹든 사 먹든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결론은 내가 뭘 하든 불만인 엄마를 더이상 안 봐도 된다는 게 대부분인 것 같다. 내가 아닌 다른사람에게는 그게 엄마가 아니라 아빠일 수도 있고 형제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혼자 사는 건 이상한 가정 시스템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Vivi sole (eo)
To live alone (en)
혼자 산다는 것 (ko)